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월 항쟁 (문단 편집) === [[미국]]의 경고, 군부의 반대 === [[미국]]의 정계와 여론도 결코 [[전두환]]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남아메리카|남미]]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독재정권을 지원하곤 했지만,[* 독재정권을 지원한 건 [[헨리 키신저]]와 같은 미국 정치인들이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데 과도하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냉전의 영향으로 미국은 독재 정권이 서는 한이 있더라도 사회주의 계열 정부가 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정책을 많이 펼쳤다. 이로 인한 대표적인 피해자가 바로 [[살바도르 아옌데]] ] 그래도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였고 군부정권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것을 좋게 볼 리 없었다. [* 이익적인 면으로만 봐도 [[전두환 정부]]를 막아야 했다. 당시 민주화 운동 최전선에 있던 [[김대중]], [[김영삼]]이 무슨 반미운동가도 아니고 어차피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세력에게 권력을 몰아주기 보다는 여러 세력이 견제하도록 하는 것이 더 안정적이었다.] 미국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에는 침묵했다. 당장 1980년 내내 미국 외교가와 정계의 최대 관심사는 [[이란 혁명|이란 이슬람 혁명]]과 그 여파로 일어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어서 [[백악관]]이건 [[미국 국무부|국무부]]건 한국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여론 역시 마찬가지여서 미국의 여론이나 언론은 외교관을 포함한 자국민들이 대거 인질로 잡힌 [[테헤란]]에 관심을 기울였지, 자국민의 안전과 관계가 없는 한국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현지시각 1980년 5월 18일(한국시각 5월 19일)에 발생한 마이애미 인종폭동 및 [[세인트 헬렌스 화산 폭발]]로 미국의 여론은 더더욱 한국에서 멀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경제마저 불경기에 접어들던 시기였는지라 그야말로 한국 문제는 [[내 코가 석 자|오비삼척]]이었다. 심지어 더 나아가 5월 23일에 [[존 위컴]] 한미연합군사령관이 한국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 광주로의 군 투입을 묵인했고, 1981년에 부임한 리처드 워커 주한미국대사도 1982년에 재야 민주인사들에 대해 "버릇없는 애X끼들"이라고 폄하했는데, 이때를 계기로 재야 민주단체 인사들이 [[반미]]로 전향한다. 그리고 이는 훗날 한미동맹에 있어서 위협이 되는 [[NL(정파)|NL]]의 급진적 반미성향을 가진 단체들의 출현을 만드는 계기도 된다. [[최형우(정치인)|최형우]] 의원이 CIA 한국지부장이었던 존 스타인과 대면한 자리에서 "이게 다 당신네들 때문이다!"라고 일갈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사실 그래도 한국 정도면 굉장히 온건하게 끝난 거다. 그래도 한국은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되고 어쨌든 간에 누가 집권하든 친미, 한미동맹 유지는 견지하지만 [[이란]], [[아프가니스탄]], [[베네수엘라]] 같이 미국의 똥볼에 국민정서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반미가 득세하는 국가로 탈바꿈하는 국가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타국들과 달리 한국은 북중소라는 적성국이 있긴 했지만.] 하지만 1987년의 미국은 1980년과 달리 본격적으로 한국의 정치상황에 관심을 두고 적극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6년 필리핀 민주혁명을 계기로 레이건 독트린을 수정해 반공친미 독재자와도 결별하겠다고 선언했으며, 무엇보다 당시 한국은 전두환의 [[3S 정책]]에 따라 민주화의 열기를 돌리려고 개최한 반드시 평화의 화합의 장이 되었어야 할 [[1988 서울 올림픽|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국이었다. 이미 [[1976 몬트리올 올림픽|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도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차별]]을 유지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 문제[* 뉴질랜드 럭비 대표팀이 남아공과 친선전을 하면서 스포츠 교류를 재개하자 이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반발하면서 뉴질랜드에 대한 제재를 요구했지만, 이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무시하자 집단 불참했다.]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집단 불참했고, [[1980 모스크바 올림픽|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에는 [[소련]]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한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이 대거 불참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공산진영이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보이콧하면서 올림픽 정신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며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됨에 따라 냉전 체제가 무너져 가면서 오랜만에 진정한 평화와 화합의 올림픽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올림픽 개최국인 대한민국이 계엄령을 내리고, 군을 투입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알쓸신잡]]에서 [[유시민]]은 올림픽과 섬머타임 덕분에 우리나라가 민주화를 앞당겼다고 말하였다.] 당연히 올림픽 때문에 수많은 외신들의 이목이 한국으로 쏠리고 있었고, 외신 기자들도 한국 국내에 많이 체류 중이었기 때문에 외국의 눈치와 감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보도한 한국의 상황은 6월 10일 이후로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등 미국 유수의 신문사들의 1면을 장식했고 미국민들은 한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받아보게 되었으며 이는 그대로 미국의 여론으로 연결되었다. 6월 16일에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 한국 민주화 지지 결의안이 제출되었고 24일 하원 본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의회와 별개로 행정부도 움직이고 있었다. 6월 17일,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 존 스타인이 [[김영삼|YS]]의 최측근 [[최형우(정치인)|최형우]]와 접촉했다. 최형우는 이 자리에서 '''이게 다 전두환의 후견인 노릇을 한 미국 탓'''이라며 만약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이 투입된다면 '''YS와 자신은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앞[* 알다시피 이곳은 '''[[주한미국대사관]]''' 앞이기도 하다.]에서 [[분신자살]]'''하겠다고 선언했다. 최형우 말고도 다방면을 통해 한국 주요인사와 접촉하고 정보를 수집한 CIA는 군 투입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하고 이를 [[주한미국대사관]] 및 본국에 보고한다. [[워싱턴 D.C.]]의 대응도 이에 동조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즉시 한국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여 군 투입을 막고자 하였다. 이때 특사 후보로 여러 명이 거론되었는데 레이건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를 특사 후보로 점찍었다고 한다. 미국의 2인자라는 강력한 상징성에다가, 부시 부통령이 [[리처드 닉슨|닉슨]] 행정부에서 UN 대사와 초대 중국 주재 연락사무소장, [[제럴드 포드|포드]] 행정부에서 CIA 국장을 지낸 이력이 있는 외교/정보통이기도 한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주미대사|주미 한국대사]] [[김경원(정치인)|김경원]]은 [[미국 국무부|국무부]] 등을 통해 이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전두환 정권의 주미 대사라는 입장에서 무작정 전두환을 옹호할 수도, 그렇다고 미국의 대응에 구경만 할 수 없던 그는 '''"전두환의 성격상 특사를 보내면 오히려 성질만 돋구게 된다"'''며 경고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보내달라고 읍소했다. 최종적으로 백악관은 그의 읍소를 받아들여 특사 파견 대신 '''대통령 친서 전달'''로 격을 낮추게 된다. 제임스 릴리[* 도널드 그레그와 함께 CIA 동아시아 지부를 책임지던 요원인데, 칭다오 태생이라 유창한 중국어와 인맥을 바탕으로 대만 핵개발을 맡았던 장셴이 포섭 같은 CIA의 동아시아 공작을 주도하던 인물이다.] [[주한미국대사]]는 6월 17일 지방 미국문화원 순시[* 말이 문화원 순시지 실질적으로 지방의 시위 진행 상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중 대통령 친서를 받았다는 연락에 급히 서울로 귀환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받은 릴리 대사는 이튿날인 6월 18일 전두환 대통령을 접견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외교부|외무부]] 관리가 접견 요청을 거절하려 했다. 이를 듣고 화가 난 [[주한미국대사관]]의 해리 던롭 정무참사관은 접견 약속을 잡기 위해 외무부와 통화하던 도중에 이렇게 비난했다고 한다.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 대사를 안 만나겠다는)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귀국의 대통령이 그랬다는 말을 접수하지 않겠습니다. 그분이 그럴 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실 수 없어요. 빌어먹을, 누가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사람 이름을 대요, 당장! 그제서야 [[최광수]] 당시 [[외교부장관|외무부 장관]]이 직접 주한미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고, 릴리 대사는 6월 19일 오후 2시에 전두환 대통령과의 접견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한편 [[주한미군]] 정보 부대에서는 6월 19일 오전에 [[한국군]]이 무력 진압에 대비하여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였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은 6월 19일 오전 10시 국방장관, 3군 참모총장, 안기부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6월 20일 오전 4시를 기하여 대학 캠퍼스와 여러 도시에 군을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같은 날 청와대에서는 무력진압을 위한 군부대 이동을 [[주한미군]]에게도 통보하라는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실제로 이 사실이 [[한미연합군사령부]]에 통보되진 않았다. 6월 19일 오전, 릴리 대사는 주한미군 수뇌부가 참석한 오찬 행사에서 윌리엄 리브시 [[주한미군사령관]][* 한미연합군사령관, 유엔군사령관 겸임]을 만났다. 릴리 대사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달할 때 시위를 진압하는 데 군대를 동원하지 말라고 말하겠다고 전달했다. 리브시 사령관은 조용히 듣기만 했는데, 릴리 대사는 이를 동의로 이해했다. 훗날 친서를 전달하면서 하술한 것처럼 주한미군사령관의 이름을 들먹인 것에 대해 리브시 사령관은 불쾌해 했지만, 그는 릴리 대사에게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서울 진입을 막을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6월 19일 오후 2시, 릴리 대사는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정치범을 석방하고, 권력을 남용한 정치 탄압 관리를 처벌하며, 언론의 자유를 신장하라는 내용이었다. 릴리 대사는 "주한미군사령관과 자신은 무력을 사용하지 말 것을 건의했고, 총리가 계엄령 선포가 임박했다고 발표한다면 '''[[한미동맹]]을 [[압박|저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저해라는 다소 차분한 표현을 쓰긴 했으나 당시 한미 관계와 주변 정세를 보면 실제로는 상당히 강한 수준의 압박이다. 냉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에게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최전방이었고, 그랬기에 외교를 제외한 한국의 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전까지의 어지간한 민주화 관련 이슈에는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미국이 한미동맹 저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쓴 건 이번 사태까지 무력진압할 경우 더이상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한국을 포기할 수 없는 미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전두환 정권을 날려버리겠다는 무언의 압박에 가깝다.], [[5.18 민주화운동|19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6월 20일 CIA 한국 지부에서는 6월 20일 새벽 4시에 한국군이 강제진압을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하였다. CIA는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6월 20일 오후에 전두환과 면담 일정이 있다는 걸 알고 그 전에 접촉하여 한국군의 무력진압 계획을 알려주었고,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무력진압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이 다시 벌어질 뻔한 위기를 막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미국 하원에 이어 상원에서도 한국 민주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민주화에 힘을 보탰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7/01/2005070170257.html|“전두환 계엄령 내가 막았다” 아시아 비망록. 제임스 릴리 회고록]] 간혹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이 전차를 출동시켜 한국군 부대 정문 앞에서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진압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끼워넣는 경우가 있는데, '''당대의 어떤 문헌이나 6월 항쟁을 학술적으로 연구한 공신력 있는 저작 및 논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뜬소문'''이다. 일례로 [[서중석]] 교수가 집필한 2011년작 《6월 항쟁: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에서도 주한미군 전차 출동 사건이나 이와 비슷한 사건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서술은 전형적인 소위 리그베다 위키발 [[문헌오염]]이다. 2010년대 초중반 인터넷에서 돌던 재담을 누군가가 사실로 오인하고 리그베다 위키 6월 항쟁 항목에 그대로 삽입한 뒤, 그 리그베다 위키 내용을 일부 인터넷 언론이나 대중서가 무책임하게 수록/기사화한 것을 다시 나무위키에서 출처로 인용하여 마치 실재했던 사건인 양 유포한 것이다.[* 해당 풍문이 삽입된 6월 항쟁 문서는 [[https://namu.wiki/w/6%EC%9B%94%20%ED%95%AD%EC%9F%81?rev=148|2014년 8월 5일 수정된 판]]인데, 이후 수정판에서 이 소문이 사실이라는 출처로 제시한 문헌 중 가장 이른 시점의 레퍼런스인 주간현대 [[http://m.hyundaenews.com/13581|2015년 5월 29일 기사]]와 '''문장이 사실상 동일하면서도 수정 일자는 1년이나 빠르다'''. 시간 순서상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사실관계 확인도 없이 무분별하게 전재했는지 명확해지는 부분.] 6월 21일에는 게스틴 시거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한국 문제에 군부가 개입하는 건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했고, 23일에는 급히 한국을 방문하고 이틀 뒤에 돌아갔다. 이때 시거는 25일 한국을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계엄 선포 반대의 뜻을 분명히 전했다."고 전했다. 또한 국군 내부에서도 시위 진압에 대해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기에 작정하고 진압을 명하면 오히려 그 [[4.19 혁명|군인들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청와대로 쳐들어갔을]]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전두환이 믿고 있던 군부조차 무력 진압에 회의적이었는데, 군의 주축에 해당하는 야전 지휘관들은 당연히 무력 진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소장~중장급 실전부대 지휘관들 또한 똑같이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병력 투입에 찬성하고 있던 일부 [[하나회|대장급 지휘관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1999년 10월 10일 방영된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6.29의 진실 편에서 하나회 핵심이며 87년 5월까지 내무장관이었던 [[정호용]]과 인터뷰했는데, 그 당시 현직에 있는 후배들이 찾아와서 '''군부대가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 준비를 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군 투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개진해왔고, 자신 역시 이에 동의하여 당시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에게 그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특히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것이 [[고명승]] '''보안사령관'''과 [[민병돈]] '''특전사령관'''이었다. 둘은 [[육군사관학교|육사]] 15기로 해당 기수 [[하나회]]의 대표주자였으며, 고명승은 [[12.12 군사반란]] 당시 청와대 경호실 소속으로 쿠데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런 둘이 전두환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민병돈은 유사시 예하 부대의 진압 동원에 반대하겠다는 뜻을 고명승에게 밝혔고, 고명승은 이 의견을 전두환에게 전달하였다. 보안사와 특전사는 12.12 당시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하는 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곳들로, 전두환으로선 상당히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후일 민병돈은 진압 명령이 강행되었을 경우, 예하 부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청와대를 점령할 각오까지 했다고 회고하는데, 시일이 꽤 지난 다음의 회고라 자기 포장용 뻥일 가능성이 크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진압 명령이 강행되었다면 '''오히려 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면 되니까.''' 게다가 명분마저도 확고하니 더더욱 일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가 무력 진압에 반대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보안사도 보안사지만 실병력들을 동원했던 소장, 준장급 지휘관들의 역할이 컸다. 당장 3개 공수여단과 20사단, 9사단 병력들이 서울로 들어올 수 있기에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6월 항쟁 때는 이 실질 병력들을 동원할 수 있는 지휘관들이 앞장서서 군 투입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이 매의 눈으로 한국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진압 작전을 실행에 옮기려면 [[한미연합군사령부]]의 관할 밖에 있는 특전여단들이 핵심이 되어 움직여줘야 했으나 특전사령관부터가 반대하고 나섰으니 대략 난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1987년 당시에는 12.12 쿠데타 당시 특전사령부가 쉽게 넘어간 것을 교훈삼아 707특임대가 특전사령부 영내에 주둔중이었기 때문에 특전사령관을 쉽게 제거할 수도 없었다. 당장 [[전두환]]의 측근들조차 대놓고 직선제를 수용하라고 권할 정도였으며, 전두환 본인이 의외로 쉽게 직선제를 수용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심지어 전두환의 군부 개입 포기 배경엔 올림픽이 얼마 안 남았다는 현실적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역시 만일 서울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난다면 올림픽 개최지를 당시 유치과정 중 낙선한 [[일본]] [[나고야시]] 등의 다른 곳으로 변경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거론했다. 설사 개최지가 변경되지 않았더라도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처럼 학살자들이 개최한 올림픽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